[김강중 칼럼] 어지럽고 멀미나는 세상
[김강중 칼럼] 어지럽고 멀미나는 세상
  • 김강중 선임기자
  • 승인 2016.10.25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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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단풍이 곱게 물들며 깊어가는 가을이다.
이토록 자연은 정연한데 세상은 어지럽고 멀미가 날 지경이다. 이제 국민들은 권력의 부정·부패로 희망을 거두었다. 
조선 왕조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한 모녀가 온 나라를 들쑤셔 화(火)를 돋우고 있다. 
용(龍)을 뜻하는 ‘미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체 모를 미르재단, K스포츠가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일개 아낙네에게 대통령은 연설문 검증을 거쳤다니 충격이다.
정의와 상식이 실종됐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언제까지 시대에 빚을 지고 국민에게 상처만 줄 것인가. 참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코너링만 잘 하면 경찰 고위간부 운전병에 발탁된다. 비선 실세면 뚝딱 명문대에 입학시키고 770억 원을 단숨에 거뒀다. 배우는 학생들이 교수의 사망진단 오류를 지적하는 불의의 세상이 됐다. 망국의 패거리 문화가 부정청탁방지법으로 배격되겠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가족이란 혈육의 의미이다. 하지만 리더라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사물도 가족으로 대하는 너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게 나라인가를 물어 온다. “20년 전 OECD 34개국 중 29번째 가입국이 아니냐” 되물었다.
하지만 자살률, 저임금, 국가부채 증가율, 이혼 증가율 등등의 최상위는 낯이 뜨겁다.
꼭 석 달 전으로 기억된다. 지난 7월 말 ‘이 난세에 영웅은 없는가’란 제하의 칼럼이 새롭다.
‘이제 또 어떤 일이 터져서 국민들의 화(火)를 돋고 놀라게 할까’라고 글을 맺었다. ‘피그말리온’ 효과일까. 100일도 안 돼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여러 ‘게이트’ 의혹이 노출되면서 관련자들은 선긋기를 하면서 손사래다. 그런데도 한낱 ‘의혹’으로 치부하며 강변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어느 후배가 말했다. 이제는 신문, 방송도 아니고 SNS 모바일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 진단했다. 시간이 흐르면 규명될 거란 믿음에 의심이 없다.
‘모전여전’이던가. 최순실 씨 딸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공분을 사고 있다. 나향욱 전 기획관의 개돼지 망언이 아물 즈음 다시 도지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라고 올렸다. 이어 “불만이면 종목(승마)을 갈아타야지. 남 욕하기 바쁘니까 아무리 다른 거한들 어디 성공 하겠니”라며 뻘짓했다. 또 “니까짓 더러운 것들이랑 말 섞기 싫어서 그래”, “주제를 알렴. 난 니네한테 관심도 없는데”란 말로 비하했다.
그녀가 2년 전 이대 체육특기자 전형에 합격해 특혜 의혹이 일자 SNS에 이같이 반박했다고 한다.
이쯤이면 막장사회라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혼돈스런 세상을 잊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이런 현실의 탓일까. ‘헬 조선’에 빗대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왜 사는가를 자문했다. 이런저런 심경은 ‘조선왕조실록’을 챙겨 시골집을 찾았다.
일독의 결론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인상 깊은 사실은 이랬다.
당쟁이 극심했던 선조 당시 동·서인은 가치관, 정치관이 너무 달랐다. 하지만 서로의 이념을 공유하고 후세에 전하는 기록은 놀라웠다.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선조수정실록’을 펴냈되 동인이 펴낸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았다. 당파 당리로 싸웠지만 금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27명의 왕들의 생생한 기록에 10명의 전임 대통령을 견주어 본다. 성군, 폭군, 무능 임금과 그런 대통령으로 나눠진다.
성군을 든다면 세종대왕이다. 그의 업적은 한글창제, 인재 등용, 과학기술 발전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중 세제 개혁 공법(貢法)을 위한 여론조사는 백미다. 절대 군주가 여론조사를 실시할 만큼 소통을 중시했다. 
이에 반해 13대 어린 명종을 대신한 문정황후의 섭정과 외척의 세도, 탐관의 학정, 과도한 징세는 오늘을 닮았다.
을묘왜변과 임꺽정 난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임진왜란을 초래했다. 왕후의 치맛바람이 조선을 풍비박산 낸 것이다.
결국 7년 임란으로 선조는 가장 무능한 왕으로 평가된다. 선조는 후궁 방계 출신이지만 능력이 출중했다. 하지만 책임감과 위기를 극복할 용기의 덕목은 부족했다.
새삼 이런 역사의 교훈은 요즘 정국과 유사하다는 느낌이다.
세종에서 보았듯 소통은 상호간 이해가 중요하다. 진정한 소통은 남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또한 변해야 한다.
400년 전 당쟁에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예나 제나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곧 성공인 것이다.
전문가 수준의 국민을 바보로 아는 정치인들, 그들에게 품위도 지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제 박 대통령의 개헌 제안도 그렇다. 4년 내내 개헌은 금기였다. 끝 모를 최순실 게이트의 호도용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헌법을 고친다면 개정부분만 새로 제정하면 된다. 그렇다면 국민의 대표인 국회 주도로 이뤄져야 옳다. 정부는 국민의 개헌의사에 따르는 수동적인 활동에 그쳐야 한다.
다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새겨본다. ‘나라가 흥할 때는(國之興也) 백성을 아픈 사람처럼 여기니(視民如傷) 이는 나라의 복이다(是其福也). 망할 때는(其亡也) 백성을 지푸라기처럼 여기니(以民爲土芥) 이는 나라의 화가 된다(是其禍也)’고 했다.
또 어떤 일이 국민들의 화(火)를 돋고 놀라게 할까. 총신(寵臣), 권신(權臣)일까, 묻혀버린 비화일까, 아니면 민족의 비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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